세상은 무대로다 - Coda (그림자)
17세기 극장 대모험 제 1기 1화인 '세상은 무대로다' 가장 뒤에 붙는 장면입니다. 주인공 일행이 바보동맹 맺은 날 밤이랄까요.

그림자


방안은 어두웠다. 비싼 브로케이드와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접대실에는 초 몇대만이 깊은 밤을 밝혔다. 고급 웃스라 원목 탁자에는 중년의 사내와 젊은 여자가 서로 마주해 앉아 있었다.

"식사가 만족스러우셨나 모르겠습니다, 중령님."

여자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교양이 넘쳤고, 유창한 아이젠어에 섞인 이국적인 남방 억양은 흠이라기보다는 매력이었다.

"아, 아주 후한 대접이었소, 프롤라인."

중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넉넉한 배를 툭툭 쳤다.

"이것 참, 이러고도 내일 갑주를 입을 수 있을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여자 역시 입을 가리고 조금 웃었다. 웃음이 그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중령님의 배려로 선적이 무사히 처리된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삼촌도 한시름 놓으셨답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조아렸고, 중령은 당황해서 반쯤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당치 않은 말이오, 프롤라인. 내가 어찌 돈 콘라도의 부탁을 거절한단 말이오. 어서 앉으십시오."

가슴에 얌전히 한 손을 댄채 두어번 더 고개를 숙여보인 그녀는 정중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중령 역시 도로 기대앉았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에 삼촌께서 이것을 전해드리라고..."

여자가 품에서 금박으로 장식된 상앗빛 봉투를 꺼내자 중령은 아예 고개까지 돌리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오! 돈 콘라도와 나 사이에 이런 게 다 뭐란 말이오, 프롤라인. 부탁이니 넣어 두시오."

"하지만 삼촌에게 꼭 전하라고 엄명을 받아서... 전하지 않으면 제가 야단맞는답니다. 절 봐서라도 받아주시면 안될까요?"

짙은 속눈썹 사이로 새파랗게 빛나는 눈빛과 마주한 중령은 마침내 '어흠, 흠!' 헛기침을 내뱉더니 탁자위에 놓여있는 봉투를 마지못해 집었다.

"그럼, 음... 이건 내가 나중에 돈 콘라도에게 돌려드리리다."

"뜻대로..."

윤기어린 진홍빛 입술에 떠오른 비웃음을 감추기 위해 여자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일단 사업 이야기가 끝나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조금은 더 가벼워졌다. 여자는 손뼉을 두번 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하인이 소리없이 휘장을 젖히고 들어와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코코아로 하시겠어요, 커피로 하시겠어요? 지금은 밤이니 코코아가 잠드시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중령은 말없이 끄덕였고, 여자는 하인에게 코코아 한 잔과 커피 한 잔을 따를 것을 지시했다. 하인이 분부대로 음료를 따라놓고 나간 후 중령은 여자 쪽을 궁금한 눈길로 보았다.

"프롤라인은 커피 들어도 밤잠 자는데 괜찮소?"

"커피 없이도 밤잠은 못 이룬답니다..."

초승달 제국이 까스띠예에 남기고 간 선물 중 하나인 검고 진한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여자는 무심코 말했다. 그 눈빛은 아주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프롤라인?"

중령이 정말로 걱정스럽게 부르자 여자는 조금 놀라며 갑작스러운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괜찮소?"

"아무 일 아닙니다. 조금 피곤한가봐요."

"내가 눈치없이 너무 오래 있었던 건 아닌가 모르겠소. 이것 참... 나이들면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허허 웃는 중령에게 그녀는 마주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코코아는 다 드시고 가셔야죠."

"그 말이 맞소! 진짜 까스띠예식 코코아는 날이면 날마다 맛볼 수 있는 게 아니니."

"초대가 너무 드물다고 항의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들렸나! 하하하."

한동안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또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여자는 거의 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그저 일상적인 얘기를 꺼내는 말투였지만,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과 커피잔을 꼭 쥐는 손가락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풍문일 뿐이었는데 굳이 중령님께까지 옮겨서 심기를 어지럽히지나 않았는지..."

현재 하인ㅤㅉㅔㄹ 경비대에 교관으로 고용된 용병이 상당한 두각을 보이고 있으며, 어쩌면 경비초소 대장부터 시작해 이곳에 정착해 승승장구할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눈앞의 사람이 현재 초소 대장이라는 것을 잊었다는듯) 지나가는 소문이라며 들은 것을 옮기고, 그렇게 유능한 부하를 두어서 자랑스럽겠다며 추켜올리기까지 한 예전의 대화는 중령의 마음에 분명 무언가의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질시 혹은 불안감 같은 것들의 뿌리를.

"그렇잖아도... 그 말 때문에 내가 그자를 승진시킬까 해서 눈여겨 보았는데..."

중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알고 보니 부하 통솔력이 전혀 없는 자더군. 하이랜드하고 문제를 일으킬 뻔하지 않나..."

"어머나...세상에."

여자는 짐짓 놀라며 입을 가렸다.

"그래서 중령님께서...?"

"아니, 아니. 결국엔 더이상 못 버틸 걸 알았는지 스스로 사직서를 냈소."

여자는 천천히 끄덕이면서 커피잔을 다시 들어 조용히 마지막 한모금을 마셨다.

"어쨌든 마음은 좋지 않네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해서요."

"그게 어떻게 프롤라인 잘못이겠소. 마음 쓰지 말아요."

이 얘기가 나오자 왠지 초조해졌는지 중령은 손수건을 꺼내 넓은 이마에 조금 솟은 땀을 닦다가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서둘러 들이키고 일어섰다.

"너무 오래 있지나 않았는지... 돈 콘라도께 안부 전해주시오."

"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여자는 일어서서 정중히 인사했다.

"나 역시 그렇소. 몸조심하시오, 프롤라인."

"중령님께서도."

하인이 방문의 휘장에서 중령을 맞이해 출구로 안내했고, 그들의 발걸음이 멀어진지 한참 후 여자는 촛불을 하나 둘 불어 끄면서 접대실에 연결된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불도 켜지 않은채, 어둠 속에서 눈빛만을 은은히 빛내며.

거의 한시간여를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는 마침내 손으로 더듬어 목에 건 십자가를 들어올려 입을 맞추었다.

"자비로운 디오스여..."

목이 메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그녀는 한참 후에야 까스띠예어로 기도를 이어갔다.

"우리 돌아가신 부모님, 호세와 마르타의 영혼에 축복을... 제 동생들 크리스토발, 디에고, 에밀리아나의 영혼에 축복을... 태어나지 못한 제 동생도 긍휼히 여기시어 디오스의 빛 속에 영원히..."

이름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끔찍한 하루동안 사라져간 친지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기도, 혹은 안타까운 부름과도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반쯤 지났을 때 여자는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눈물을 허용하는 시간. 디오스께 자신의 영혼을 그대로 내보이는 이 시간은 영혼을 찢는 아픔이면서 동시에 달콤한 해방이기도 했다.

"...그리고 산 후안에서 희생된 모든 영들을 축복하소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제가 그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흐느낌에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간신히 속삭였다.

"자비로운 디오스여... 그 이름에 축복 있을 예언자와 성자들이여... 저에게 원수를 미워하지 않을 힘을 주시옵소서. 그 사람... '유령'이라고 불리는 사내를 이 밤에도 지키고 축복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저를 통해 그에게 가하실 성스러운 불길로써 그의 영혼이 정화되어 마침내 디오스께 돌아올 수 있도록... 뼈를 깎는 그 고통의 끝에서 그가 디오스를 부를 힘을 주소서."



밤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 되었을 때 발렌시아 아세도 데 온티베로스 데 솔다노 델 까스띠요는 침실에서 조용히 걸어나와 하인 방으로 내려오더니, 곤히 자고 있던 하인을 흔들어 깨웠다.

"준비를 시작해요, 마르코."

한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과 태도, 물기없는 눈과 태연한 목소리에서 이 여자가 좀전까지 흐느끼며 기도하던 모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다.

"내륙 아이젠으로 옮길 때가 됐군요."

발렌시아가 밤에 잠 못 이루고 일하는 것이나 갑작스러운 지시를 내리는데 익숙한 마르코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발렌시아는 2층으로 다시 올라와 자기 침실의 큰 창문을 열어젖히고 발코니로 걸어나왔다.

새벽을 기다리는 시간,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검은 하늘의 동쪽 끝은 희미한 잿빛을 살짝 품고 있었다. 입김이 허옇게 공기중에 퍼지는 것을 지켜보며, 잠든 프라흐티히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발렌시아는 아이젠 내륙 시장상황 조사, 아이젠퓌르스텐과의 관계 확립, 보안 문제와 보급, 교통 등을 생각했다. 삼촌이 맡기는 일을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녀는 잘 해낼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의 진짜 목적, 디오스께서 그녀에게 내리신 사명은...

'유령 사냥.'

그녀는 목에 건 십자가를 손이 하얘지도록 꼭 쥐었다. 그리고 또한번 속으로만 기도했다. 디오스의 정의의 도구로써만 자신을 써달라고, 오직 성스러운 불길이 되게 해달라고...

긴 밤이 끝나고 교역강 위로는 차가운 잿빛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예, 일단 이렇게 되었습니..아하하..하하...하.

너무 길군요. (털썩) 이쯤 되면 마지막 장면이라기보다는 외전에 가깝습니다. 일단 발렌시아라는 인물을 확립해 보겠다는 욕심 때문에...흑흑.

어째서 인물이 이딴(?) 모습이 되었는가는... 뭐, '산후안의 유령 널 짓밟아 으스러뜨려 버리겠어! 오호호호홋!' 식보다는 좀더 특색있는 인물을 만들고 싶어서 말이죠. 물론 알맹이는 똑같지만 사람은 때로 자기 자신마저도 속일 필요가 있는 동물 아니겠습니까. ^^ 또 진정으로 자기 행동이 옳다고 믿는 악당을 만들어 보고 싶었고, 신앙심만큼 좋은 꺼리도 없겠다 싶어서... 저는 사실 맹목적인 악의보다 정의가 자기 편이라고 믿는 신념이 더 무섭더군요.

신앙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신심 가지신 분들이 기분나쁘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이건 특정 종교에 대한 공격 같은 건 아닙니다. 로키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신교와 구교 양쪽 다 많은 기독교인을 알고 있고 그중 많은 분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절대 특정 종교 공격 같은 찌질한 의도는 없다는 걸 이해해 주십..(꺼이꺼이)

또 뭐가 있으려나... 에, 처음에 계속 '여자' '그녀' 하다가 마지막에야 이름이 나온 건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 그냥 그때쯤 이름이 떠올랐을 뿐. 다시 읽어봐도 앞에 끼워넣을 부분이 딱히 보이지 않아 그냥 이대로 갑니다. 까스띠예 자료집의 온티베로스 가문 설명을 보시면 약간의 배경은 될지도요.

아, 그리고 저 발렌시아 아가씨 믿는 게 베르두고 아저씨랑 묘하게 비슷해서 이단심문회와 뭔가 관련이 있다고 해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산 후안이 함락된 악몽같은 날 이후로 이단심문회의 가르침을 통해 위안을 얻었을 수 있겠지요. 4화에 나올 키네스양과 안좋게 얽힐 수 있고. 권력의 공백 상태인 비셰에 이단심문회가 활동할 발판을 마련해 준다든가...

뭐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해 봤습니다. 2화도 기대되는군요~
by 로키 | 2006/06/11 14:06 | 진행(GM)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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